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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버려주세요.
츠키야마 씨의 기행이 시작된 지 2주가 지났다. 필요도 없는 책장을 주문하더니, 껍데기만 남은 상자 안에 들어가 있다. 고양이처럼 상자 안에서 웅크리고 있으면 만족감을 느끼는 걸까. 그런 거 치곤 언젠가 들여다보았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사사키 하이세는 걱정스럽게 그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때 하이세는 소파에 앉은 채 바닥에 발을 디딘 채였다. 시선은 상자인지, 그 안의 남자인지 헷갈리게 어중간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커피 마실래요?”
하이세가 상자 안에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바닥을 향하던 붉은 눈동자가 떠오른다. 자신보다 늘 시선이 높던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있으니, 작게만 느껴졌다. 하이세는 츠키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그리고 웃었다.
아마 츠키야마는 모르겠지만, 아까 커피란 단어에 츠키야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시고 싶단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대답을 들은 셈이었다. 하이세는 주방을 향했다. 의아한 시선이 따라오는 듯했지만, 커피포트가 소리를 내면서 사그라졌다.
너무 뜨겁지는 않게, 커피를 식혀 잔에 담았다. 일부러 커피를 따른 다음, 오디오의 노래가 세 번 정도 바뀔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음악에 맞춰 까딱거리던 하이세의 손가락이 멈춰 잔을 감쌌다. 넘쳐흘러도 다치지 않을, 미지근한 커피다. 하이세는 주방을 나와 상자로 향했다.
“커피예요.”
하이세가 조심스럽게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츠키야마는 상자 속에 들어온 커피를 들어 홀짝였다. 뜨거운 커피만큼 맛있을 리 없는데, 잘도 마신다. 정말 고양이 같다고, 하이세는 생각했다. 저만큼 크기면 노르웨이 숲 정도일까, 우스운 상상도 했다.
“츠키야마 씨.”
커피가 반쯤 담긴 잔이 흔들린다. 츠키야마가 하이세를 바라본다. 하이세는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저 기행을 눈감아줄까.
“이제 말해주지 않을래요? 츠키야마 씨 목소리를 들은 지 너무 오래 되었는걸요.”
이대로 고양이가 되어버리면 안 돼요. 고양이는 정말 귀엽지만, 책임지고 키우는 건 자신 없으니까. 하이세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모르겠어.”
“곤란해요.”
하이세가 상자의 한 면을 잡아 턱을 기댔다. 상자 속을 내려다보던 얼굴은 난처하게 웃다가 곧 안타깝게 변했다.
“난 괜찮아, …키 군.”
볼이 뜨겁다 싶더니, 길쭉한 손이 닿았다. 그 이름은 제가 아닌걸요. 하이세는 그의 잘못을 짚어주려다가 말았다. 위로해주려는 그에게 못되게 굴고 싶진 않았다.
“상자 속은 편안한가요?”
하이세는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리고 아주 쓸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응.”
“다행이네요.”
목소리를 들었으니, 다행이라고. 하이세는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다만, 상자 속에서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츠키야마의 다리도 너무 아프고, 그를 내려다봐야 하는 자신의 목도 너무 아프니까.
하이세는 오디오를 켰다. 휴대폰만 켜면 간편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이 시대에 cd를 들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하이세는 유행에 빠삭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일지 몰랐다. 카세트테이프를 듣던 시절에 살았다면, 전축을 돌렸을 테다. 손이 더 가고 촌스럽긴 해도, 깊이가 있다. 커피를 내려 마시고, 인쇄된 활자를 읽는다. 뒤처진 기계를 사용하는 데에는 어쩌면 과거에 대한 동경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어리석고 가벼운 부러움과 질투.
아마 그건 기억도 마찬가지일 테다. 자신이 모르는 카네키 켄이라는 사람에게 질투를 느낀다. 단순히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다는 감정보다는 훨씬 더 강렬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츠키야마 씨가 사랑하던 남자다. 자신은 몰랐던 츠키야마 씨를 알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몸이 꼬일 만큼 질투가 인다.
카네키 군. 츠키야마 씨가 그를 부를 때면, 그리움이 바다의 소금기처럼 젖어드는 듯했다. 그래서 츠키야마가 그를 그리워할 때마다 짓궂게 굴었다. 지금처럼 츠키야마가 잠꼬대처럼 그를 부를 동안에도, 일부러 단잠을 깨우지 않는다. 평소 같았으면 입술을 가져다대고, 악몽에서 건져줬겠지만.
물기에 젖은 속눈썹이 흔들리더니, 새빨간 눈동자에 초점이 잡힌다. 하이세는 자신을 보고 안도하는 츠키야마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은 애처롭다. 하이세가 츠키야마를 끌어안자, 츠키야마는 말없이 매달려온다.
“괜찮아요?”
괜찮을 리 없는데, 츠키야마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이세가 츠키야마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츠키야마는 자신보다 작은 하이세의 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팔이 저리다고 웃는 하이세를 보고는 겨우 놓아줬지만.
하이세는 츠키야마가 일어나자마자, 음악을 바꿨다. 츠키야마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나 싶더니, 오디오를 꺼버렸다. 그리고 상자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커피를 끓이러 주방을 향하던 하이세가 놀라서 돌아왔다.
“이 음악은 별로예요?”
츠키야마가 멀뚱히 하이세를 바라본다. 하이세는 오디오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멈췄다.
“듣고 싶은 게 생기면 말해줘요.”
하이세는 상냥하게도 말했다. 츠키야마는 하이세가 커피를 끓이고 치울 때까지 상자 속을 나오지 않았다. 미지근한 커피가 목구멍을 넘어갔다가 사라졌을 때도, 그는 계속 상자 안이었다.
하이세는 츠키야마를 상자에서 꺼내려하다가 포기하고, TV를 켰다. 꼭 닮은 연인이 사랑을 말하고 있는 영화다. 하이세가 브라운관을 바라보고는 중얼거렸다.
“사랑하면 닮는데요.”
“저는 얼마나 츠키야마 씨를 닮았을까요.”
“…좀 부러워요.”
그러는 하이세는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그래서 츠키야마가 일어서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도 좀 시간이 걸렸다.
“닮았어.”
하이세는 자신을 힘들게 껴안은 남자를 보며 설핏 웃었다. 상자를 벗어나지 못한 주제에, 남자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자신과 닮았다니, 츠키야마는 얼마나 거짓말을 할 셈인가. 하이세가 웃으려다가 곧 팔을 들어 츠키야마를 고쳐 안았다.
(대충 카네키가 전생의 연인, 하이세가 현생의 연인이란 설정입니다. 상자 안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건, 은연중에 하이세가 자신을 버려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이세는 전혀 버릴 생각이 없지만. 츠키야마는 하이세와 있을 때 단절,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이상하고 영양가 없는 내용이에요~ 하지만 하이세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게 츠키야마 같아요. 울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서로, 뭔가 안타까운 느낌… 이런 걸 쓰고 싶었는데, 지금 제가 답답하다는 것 외에는 전해지지 않았네요. 뭐야, 이건. 이시다 스이 짜증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