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람이 차다 싶더니, 눈이 내린다. 일정하게 온도가 유지되는 실내에 익숙해진 몸은 한기를 견디지 못하고, 부산스럽게 떨렸다. 밖의 공기를 느끼기에는 셔츠를 하나 걸친 가벼운 차림이다. 니무라는 거실에 붙은 커다란 창을 닫아 소파로 돌아왔다. 아까 끓여놓은 커피가 조금 식어 딱 알맞은 온도가 되었다. 그는 커피를 홀짝이면서, 신문을 넘겼다. 몇 장 안 가 익숙한 얼굴이 보여 손이 멈췄다. 공동전선, 인간, 구울. 그런 재미없는 단어 사이에 사랑스러운 이름이 섞여있다. 츠키야마 슈. 흐릿한 사진이지만, 남자의 아름다움을 가리지는 못한다. 파릇한 나이도 지났는데, 저렇게 예쁠 이유가 있을까. 니무라가 턱을 괴고, 사진을 노려보았다.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신문을 덮었다. 그대로 소파에서 일어난 니무라는 기..
1.가벼운 인사였다. 그만큼 슈가 감정을 숨겨야했다는 의미기도 했다. 켄은 오랜만이네요, 라고 대답했으나 머쓱한 얼굴로 볼을 긁었다. 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한동안 침묵이 일었다. 그는 아까 슈를 보자마자 책상에서 일어나더니, 꼼짝없이 서 있었다. 슈는 작게 한숨을 쉬며, 얼빠진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 때마다 먼저 말을 거는 건 슈의 몫이었다. 슈는 편안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웃을 수 있을 때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카네키 군, 몸은 괜찮아?”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얼얼하게 답했다.“네, 아주 좋아요. 그런데 갑자기 왜…?”“벌써 몇 년이 지났구나, 카네키 군이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던 때가. 이제..
나를 버려주세요. 츠키야마 씨의 기행이 시작된 지 2주가 지났다. 필요도 없는 책장을 주문하더니, 껍데기만 남은 상자 안에 들어가 있다. 고양이처럼 상자 안에서 웅크리고 있으면 만족감을 느끼는 걸까. 그런 거 치곤 언젠가 들여다보았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사사키 하이세는 걱정스럽게 그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때 하이세는 소파에 앉은 채 바닥에 발을 디딘 채였다. 시선은 상자인지, 그 안의 남자인지 헷갈리게 어중간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커피 마실래요?”하이세가 상자 안에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바닥을 향하던 붉은 눈동자가 떠오른다. 자신보다 늘 시선이 높던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있으니, 작게만 느껴졌다. 하이세는 츠키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그리고 웃었다.아마 츠키야마는..
거짓의 비극(미식 메이트 후루츠키, 모델 츠키야마) 가끔 좋아하던 음식의 맛을 혀끝에 되새기곤 한다. 당도 높은 케이크가 지나간 뒤, 쫄깃한 파스타의 면발이 혀를 스친다. 표정이 풀리면 추해지는데도, 입술을 벌리고 허공을 음미한다. 빨대로 들어오는 액체는 쌉싸름하지만. 코를 찌르는 향긋한 냄새에 몸이 잘게 떨렸다. 꿀을 잔뜩 바른 팬케이크가 접시 위에서 말랑말랑하게 기다리고 있다. 시즌이 끝나면 팬케이크를 먹어야지. 슈가 다짐하자마자, 팬케이크는 무자비한 폭군의 칼에 엉망이 된다. 아름다운 자태는 어디 가고 잔뜩 붕괴되고 해체된 팬케이크를 망연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슈는 빽, 귀를 쏘는 소리를 질렀다. “PG!”“아, 먹는데 왜 그래요.” 니무라는 팬케이크를 우물거리며 불만스럽게 답했다. 비스듬히..
락밴드하던 카네츠키 재회하는 썰 1. 그때 켄은 기타를 만지고 있었다. 의미 없는 음들을 치며, 소리를 조정하는 작업이었다. 녹음실 밖 소파에 걸터앉아 있으면, 얼마나 기타 끝에 집중하느냐가 중요해졌다. 집중이 흐트러지는 순간, 잡음이 켄의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방음 장치가 발린 녹음실이 아닌 공간은 외부의 소리를 전해오기 쉬웠으니까. 딱딱,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는 구두소리였다. 운동화는 확실히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하이힐 같지는 않았다. 남자 구두, 저런 구둘 신을 사람이 자신의 지인 중 몇 명이나 될까. 켄이 고민하는 사이, 구두소리는 코앞까지 다가와서 멈췄다. 켄이 고개만 돌리면 구두의 주인을 알 수 있을 거리였다. 하지만 켄은 굳이 머리를 움직이지 않아도, 그를 알 것 같았다. “…카네키 군..
생일 축하해 한때는 살아있기를 바라지 않은 적이 있다. 그 묵직한 감정이 사랑이라 알지 못한 채 심연 같은 어둠을 헤맸다. 그가 살아있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랬다. “생일 축하해, 슈군.” 다정하게 웃으며, 케이크를 내민다. 파파, 슈는 탄식처럼 아버지를 불렀다. 웃는 모양대로 주름진 얼굴이, 세상의 애정을 모두 긁어모아 담은 듯한 눈빛이 가슴을 울컥하게 했다. 슈는 입술을 길게 찢어 웃으며, 케이크를 받았다. 식탁에 내려놓은 케이크 위에 촛불이 올라갔다. 밤을 밝히는 가로등처럼 불빛이 아른거렸다. 축하 노래가 들려오고, 슈가 숨을 모아 촛불을 껐다. 촛불이 다 꺼지고 환하게 웃었을 무렵, 셔터 소리가 찰칵 지나갔다. 모두를 초대하지 않아서일까. 마주한 벽면에 공간이 많이 남아 허전했다...
나의 폭군 한때는 그의 불안정을 사랑한 적이 있었다. 고작 한철을 위해 피어나는 꽃처럼 제 몸을 태우는 위태로움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던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츠키야마에게 그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하찮은 존재처럼 여겨져도 좋았던 나날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한 위태로움만큼 그 간절함도 한철일 줄은 미처 몰랐었다. ‘…….’ 제 품에 기대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이 남자는 누굴까. 츠키야마는 습관처럼 한숨을 쉬다가 그의 등을 끌어안아 제게 당겼다. 힘없이 쏟아져 내리면서 부대끼는 단단한 몸이, 꼭 숨죽은 절규처럼 느껴졌다. 나의 왕. 츠키야마는 그 속으로 담기만 해도, 애틋한 말을 감히 내지 못했다. 대신 그의 머리 위로 제 숨이 섞인 중얼거림을 뱉어냈다. “…오늘도 힘들..
1. 집은 주인을 닮기 마련인가 보다. 츠키야마 가는 몇 번의 주인이 바뀌었는데도, 특유의 풍이 있었다. 밝고 경쾌하면서도, 떠들썩하지는 않은 저택은 그곳에 살았던 주인들의 꼿꼿한 등을 닮았다. 친절하게 느껴지는 미소와 달리 우아하고 정제된 몸가짐은 다른 사람들에게 은근히 선을 그었다. 잔을 들어 커피를 마시는 츠키야마 역시 주변과는 동떨어진 존재처럼 보였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단발머리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니, 고요한 목소리로 알렸다. 츠키야마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기울였다. “손님? 누구지?” “잘 모르겠습니다.” 츠키야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실눈을 떴다. 잠시 생각에 잠긴 츠키야마는 이내 여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방으로 맞이하도록.” 츠키야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
[카네츠키] 외로운 글 *퇴고는 천천히~ 내게도 향기가 있다면 그건 외로움일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밤새 엉망이 된 머리를 거울에 비춰보며, 켄은 그런 생각을 했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어 넘기자, 머리는 제법 그럴듯해졌다. 하지만 수도꼭지를 틀어막아도 손금에 물이 차듯이, 본연의 외로움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티가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체취란 그리 쉽게 숨겨지지 않을 테니까. 혹시 외로움이 정말 맡아지지는 않을까. 그래서 켄은 가끔씩 손목에 코를 박고, 무슨 냄새라도 나는 양 킁킁거리고는 했다. 당연히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굳이 냄새가 난다면 아까부터 손에 묻은 왁스 냄새 정도였다. 그마저도 비누칠을 하면 사라지기 마련인데, 우습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맡아지지도 않는 주제에 사라지지도..
1.츠키야마 씨가 죽었다. 그가 죽었는데, 왜 자신을 위로하는지 모르겠다.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이라면 사실 이 자리에 없는 츠키야마 씨겠지. 켄은 사람들이 제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누군가 혀를 끌끌 차며 안쓰러워하기도 했지만, 저와 상관없는 일처럼 멀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장례식은 가지 않기로 했다. 아무도 켄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차라리 누군가 끌고 가주기를 바랐는데, 모두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밖으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검은 옷, 검은 구두. 어디로 가는지 뻔히 보이는 바람에 켄은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자꾸만 흐려져만 가는 얼굴에 켄은 쿠션을 잡고 끅끅 추하게도 울었다. 하지만 얼마 울지도 못하고 멈췄다. 언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