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가벼운 인사였다. 그만큼 슈가 감정을 숨겨야했다는 의미기도 했다. 켄은 오랜만이네요, 라고 대답했으나 머쓱한 얼굴로 볼을 긁었다. 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일었다. 그는 아까 슈를 보자마자 책상에서 일어나더니, 꼼짝없이 서 있었다. 슈는 작게 한숨을 쉬며, 얼빠진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 때마다 먼저 말을 거는 건 슈의 몫이었다. 슈는 편안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웃을 수 있을 때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카네키 군, 몸은 괜찮아?”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얼얼하게 답했다.
“네, 아주 좋아요. 그런데 갑자기 왜…?”
“벌써 몇 년이 지났구나, 카네키 군이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던 때가.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아직 나한테는 그때의 카네키 군이 눈에 선한걸.”
아아, 켄의 입에서 이제야 알겠다는 소리가 돌아왔다. 슈는 눈앞의 온화한 남자를 보면서, 한때 상처투성이였던 소년을 떠올렸다. 잔뜩 날이 서서 자신마저 다치게 할 것 같았던 그는, 이제 어른이 되어 행복하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만든 이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가끔 슬퍼지곤 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그렇게 행복했으면서 욕심은 버려지지 않았다. 눈을 뜨기만 하면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를 위해서 뭐든 하겠다고, 슈는 기도했다. 그리고 그는 기적처럼 눈을 떴다.
지금도 그가 눈을 떴던 그날을 떠올리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영원히 멈춰있던 눈이 천천히 올라가 멍한 눈동자에 시선이 맺히던 그 찰나를, 자신은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마치 새벽을 밀어내 햇살을 반기는 창의 블라인드처럼 온 세상에 빛이 스며들어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러니, 지금처럼 자신이 알던 모습이 아니더라도 괜찮다고. 슈는 스스로 위로했다.
독기가 빠져 선해 보이는, 낯선 남자가 책상 위에 있던 책을 덮는다. 그는 책상을 떠나 슈가 앉은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하지만 슈의 시선은 잠시 책상에 머물렀다. 책 옆에는 그가 마셨을 커피가 잔 안에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잔여물과 흔적만 남은 커피처럼 슈는 마저 남은 자신의 감정을 긁어냈다. 그리고 이 낯설고 사랑스러운 남자에게 애써 웃어보였다.
“좋은 오후야.”
이곳은 남자의 향기가 흠뻑 느껴지는 서재다. 슈가 자신이 사랑하던, 그리고 이제 잘 모르겠는 존재가 혼재된 남자를 바라보았다. 켄이 커피를 내오겠다면서, 서재를 빠져나갔다. 슈는 그 뒷모습을 보는 대신, 과거의 잔재를 더듬었다.
꼭 저렇게 생긴 소파에서 좀처럼 웃지 않던 남자가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곤 했다. 조그만 인기척에도 소스라치게 깨어나던 남자는, 슈를 보고는 안심했다. 츠키야마 씨. 딱딱한 호칭이 사실 사랑해란 말보다 더 설렜다면 믿을 수 있을까.
‘카네키 군.’
“카네키 군.”
슈는 그때 자신의 대답을 따라했다. 그리고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밖에서 커피가 끓여지는 소리가 들린다. 김을 내뿜는 커피포트가 연상되어 기분이 나아졌다. 이제 되었다고, 슈가 입술을 끌어올리며 생각했다. 사랑의 종결이었다.
2.
슈는 요즘 바빠졌다. 공동전선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우스운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아침이면 벨을 울리고, 집을 찾아오는 불청객이 생겼다. 적의가 좀 사라졌을 뿐, 데면데면한 사이인 남자다.
“키리시마 군.”
“아야토인데.”
“이름을 모르는 건 아니야. 도대체 왜 맨날 찾아오는 거지? 누나가 걱정되는 거라면 내가 아니라 카네키 군에게…”
슈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꽃다발을 쳐다보았다. 이게 뭘까. 슈의 표정이 찌푸려지자, 아야토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꽃이 예뻐서.”
“이런 건 리틀 히나미… Sorry, 레이디 히나미에게나 어울릴 거라고.”
아야토가 히나미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진 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일부러 히나미의 이름을 올렸는데, 아야토의 얼굴이 묘해졌다. 선생님의 물음에 학생들이 잘못 대답했을 때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Non, Non, Non…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슈가 속으로 Be cool!을 열여덟 번 정도 외쳤을 때, 아야토의 뺨이 눈에 들어왔다. 눈처럼 새하얗다고 생각했던 피부가 눈에 보이게 붉었다. 이건 좀, 위험했다. 슈는 한숨을 쉬면서 일부러 냉하게 말했다.
“이야기 상대라면 해줄 수 있다만, 성가시게 군다면 그녀를 부르겠어.”
“응, 같이 대화해줘.”
아야토가 순순하게 대답했다. 슈는 입술을 깨물며, 아야토를 거실로 안내했다. 다시 말하면, 그전까지 둘은 현관문에 있었단 얘기였다. 아야토는 거실로 들어와 슈가 소파에 앉는 모습을 보며,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슈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아직 어린 나이기도 하고. 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턱을 괴었다.
“그래, 무슨 고민이지?”
“좋아하는 상대가 마음을 안 열어주는데…”
연애상담인가, 좀 불안한데…?
“응.”
“어떻게 하면 마음을 열어줄까?”
아야토가 진지하게 말하자, 슈의 눈이 커졌다가 다시 제 크기로 돌아왔다. 저런 눈빛을 할 수 있구나, 새삼 신기했다. 이러면 좀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물론, 그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어떤 사람이지?”
“나보다 나이는 좀 많고, 성격은……좀 그래. 혼자만 즐겁고, 말하는 것도 재수 없는데다가 아는 척도 심해. 옛날에는 시끄럽기까지 했는데, 요샌 좀 나아졌어.”
“…혹시 싫어하는 사람 이야기 아닌가?”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좋아해.”
아야토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슈는 신선한 반응에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 단점이 많은 상대를 좋아한다니, 이해할 수 없군. 하지만 Interesting! 도대체 그의 어떤 점이 좋은데?”
“웃으면 예쁘고, 은근히 주변 사람들을 잘 챙겨줘. 그리고 가끔 씁쓸한 표정을 짓는데 그때마다 웃게 해주고 싶어.”
슈가 잘 모르겠다는 눈길로, 아야토를 바라보았다. 아야토는 설득하듯이 입을 뻐끔거리다가 주먹을 쥐었다. 잘 표현이 되지 않아 억울한 모양이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아야토를 바라보자, 아야토가 중얼거린다. 다짐하는 목소리가 꽤 진중해서 슈도 가슴이 뭉클했다.
“저기, 나는 어때?”
슈가 잠시 딴 생각을 하는 동안, 아야토가 물어왔다. 꼬맹이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고 칭찬을 하던 차라, 슈는 조금 놀라서 되물었다.
“어, 어?”
“나는 연애상대로 어떠냐고?”
아야토의 표정이 절박해서, 괜히 이쪽도 죄책감이 들었다. 왠지 아무렇게나 대답해주면 안 될 것 같은 책임감마저 생겨났다.
“음… Of course, 완벽하지! 키리시마 군은 강하고 아름다우니까.”
“그리고?”
아야토가 고개를 쭉 내밀었다. 슈는 어떻게든 그에게 만족스러울 대답을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가 어물쩍거리자, 아야토가 어느새 몸을 붙여와 대답을 기다린다.
“키, 키리시마 군?”
“대답해줘.”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면 안 되는데? 슈가 당황해서 몸을 뒤로 뺐다. 그럴수록 커지는 아야토의 얼굴은 무시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