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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람이 차다 싶더니, 눈이 내린다. 일정하게 온도가 유지되는 실내에 익숙해진 몸은 한기를 견디지 못하고, 부산스럽게 떨렸다. 밖의 공기를 느끼기에는 셔츠를 하나 걸친 가벼운 차림이다. 니무라는 거실에 붙은 커다란 창을 닫아 소파로 돌아왔다. 아까 끓여놓은 커피가 조금 식어 딱 알맞은 온도가 되었다. 그는 커피를 홀짝이면서, 신문을 넘겼다.

몇 장 안 가 익숙한 얼굴이 보여 손이 멈췄다. 공동전선, 인간, 구울. 그런 재미없는 단어 사이에 사랑스러운 이름이 섞여있다. 츠키야마 슈. 흐릿한 사진이지만, 남자의 아름다움을 가리지는 못한다. 파릇한 나이도 지났는데, 저렇게 예쁠 이유가 있을까. 니무라가 턱을 괴고, 사진을 노려보았다.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신문을 덮었다.

그대로 소파에서 일어난 니무라는 기지개를 폈다. 심심한 생활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오늘은 뭘 하고 시간을 죽여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초인종이 울렸다. 며칠 전 시킨 택배가 온 모양이다. 여기는 산간 지방이어서 이렇게 빨리 올 리 없는데. 니무라가 반신반의하면서도,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자, 뜻밖의 남자가 서 있었다. 추위에 코끝이 빨개진 남자는 우습지만 좀 선물 같았다. 사진을 잘 받는 게 아니었구나. 니무라는 무심코 생각했다. 그리고 오래된 건물이라고 방치하지 말고, 인터폰을 달걸. 가벼운 후회도 했다.


2.

오랜만에 만난 남자는 차분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요란스럽고 떠들썩한 남자였는데, 이제는 묵묵히 커피를 마실 줄도 알았다.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성숙함이 묻어나는데 비해 얼굴은 앳되기만 하다. 사진에서는 머리를 넘겨서 몰랐는데, 머리를 내려 짤막한 앞머리를 드러내니 고등학생이라 해도 믿을 법했다.

“머리 잘랐네요. MM씨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자주 하곤 했죠.”

남자가 니무라의 말에 흠칫 놀랐다가 얼굴을 붉혔다.

“여전히 고운 말은 못하는군.”
“사람이 아주 바뀔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거 치곤 많이 변했는걸.”

남자는 먹먹하게 니무라를 바라보았다. 니무라는 남자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속이 검게 변하는 듯해서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남자는 니무라의 침묵을 알아채고, 고요하게 말했다.

“찾느라 고생했어. 해가 몇 번이나 바뀌어야 겨우 찾았으니까. 일본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다면서?”
“……정말 재밌는 이야길 하네요.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니무라는 날카롭게 물었다. 남자는 예전보다 단단해진 모양이다. 아무런 미동 없이 니무라의 말을 받으며, 니무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이제 핀치에 몰린 사람은 니무라였다. 남자가 이렇게 나온다면, 자신도 이를 드러낼 수밖에. 늘 미안한 짓만 하네요, 당신에게는. 니무라가 속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삼키며 냉정하게 말했다.

“난 당신이 찾아온 게 달갑지 않아요.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고요. 그리고… 하아, 솔직히 말할게요. 당신이 왜 나를 찾았는지, 여기 왔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오히려 거북해요.”

자신은 훌륭한 거짓말쟁이다.

“돌아가요.”

남자에게서 눈을 돌릴 수 없는 주제에, 입으로는 잘도 말하니까.

“…몇 년 만에 만난 내게, 그 말이 고작인가?”

남자의 목소리가 젖어있었다. 기다랗게 눈물이 볼 위를 미끄러지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남자가 울면 봐서는 안 될 광경을 본 어린 아이처럼 얼어붙었다.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가 되어 남자의 울음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남자는 얼굴이 흠뻑 젖도록 슬픔을 멈추지 못했다. 남자의 설움이 냉담한 니무라의 가슴에 스며들 즈음, 니무라는 겨우 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어루만졌다. 

남자는 깜짝 놀라서 눈이 커졌다가 곧 니무라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쳤다. 구원이라도 받은 양 부드럽게 누그러지는 눈매가, 니무라에게는 더없이 슬프고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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